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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전

평생 차별과 싸운 남자 - 제시 오웬스

by 캣-츠비 2021. 8. 10.

안녕하세요. 모두의 백과사전 by 캣츠비 입니다.

 

육상 단거리에서 과거 올림픽 기록 보유자이자 당대 최고의 육상선수로 손꼽혔던 미국의 제시 오웬스는

일생을 차별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왔습니다. 오웬스는 당시의 다른 운동 선수들과 달리 실력이 아닌 자신의 피부색으로 정의되고 일상생활은 제한을 받아왔습니다.

그는 1936년 아돌프 히틀러 체졔의 독일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는데,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독일제국은 그에게 다른 금메달리스트와는 다른 매우 굴욕적인 대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종청소를 주장하던 나라에서 그가 겪은 인종차별은 고향인 미국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운동 선수 경력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Owens는 개인적인 투쟁을 견뎌냈고 1960년대 후반의 민권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원칙보다 부를 더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죽기 10년 전, 인종 관계에 대한 철학이 발전하여 마침내 시민권 운동을 옹호했습니다.

 


학교에서 인종 차별을 겪다

제시 오웬스는 1913년 앨라배마주 오클랜드에서 10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오웬스가 9살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님은 더 나은 직업을 찾기 위해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서 오웬스는 달리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으며, 중학교 시절 은사를 통해 운동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4학년 시절 오웬스는 100야드(약 91미터) 달리기와 멀리뛰기에서 전국 신기록을 세웠으며,

220야드 달리기에서도 오하이오주 신기록울 수립했다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오웬스는 오하이오주 주립대학에서 육상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갔는데, 고등학교까지는

흑인 전용 고등학교여서 차별이 없었지만 대학에서 그는 엄청난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흑인 용 기숙사가 없어 따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으며,

우수한 운동선수에게 지급되는 장학금도 오직 백인 학생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회를 위해 여행을 할 때면 그는 항상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으며, 팀원들과는 다른 호텔에서 머물고

별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다.

오웬스는 미국 내에서 매우 유명한 대학 육상선수였지만, 세계적으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이 전체주의로 물들어있던 시절 히틀러의 독일 제국은 베를린 올림픽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백인 우월주의를 독일 전역에 보여주려고 했으며, 우수한 흑인 선수는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웬스는 200미터, 400미터 계주, 멀리뛰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100미터 종목에서는 세계 기록과 타이를 이루며 4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베를린에서의 성공은 오웬스에게 흑인으로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백인 팀 동료들과 같은 호텔에서 훈련하고 여행하고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다시 차별이라는 문제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올림픽 직후 올림픽 4관왕을 축하하기 위한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호텔 직원으로부터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다른 메달리스트와는 달리 백악관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후에 회고록에서 “내가 1936년 올림픽에서 4개의 메달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후, 모두가 나를 뺨을 때리거나, 악수하거나, 나를 그들의 방으로 데려가려고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는데, 당시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을 위해 훈련하느라 오웬스의 학교 성적은 좋지 못했는데, 결국 그는 성적부진으로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흑인 야구 리그에서 뛰었으며, 세탁소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불행히도 그의 사업수완은 운동능력만큼 좋지 못했으며, 결국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가져온 해로부터 3년 뒤인 1939년에 파산을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인권 운동을 지지하다

1936년 이후의 오웬스가 겪은 경험은 미국의 인종 관계에 대한 그의 철학을 새롭게 형성해주었습니다.

그는 흑인이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경제적 수단을 가지고 싸워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4개의 금메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원도 없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의 삶을 투영해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카를로스(John Carlos)가 시상식에서

메달을 받는 동안 블랙 파워 경례를 한 것으로 유명해졌을때도 오웬스는 그들의 방식에 반대했습니다.

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 “검은 주먹은 무의미한 상징이다. 그것을 열었을 때, 당신은 약하고 빈 손가락인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검은 주먹이 의미가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 안에 돈이 있을 때 뿐이다. 거기에 힘이 존재한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는 흑인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방향은 달랐지만 흑인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평생 차별을 당하면서도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맞서 싸웠던 그는 1980년 폐암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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