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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무엇이 문제인가?

by 캣-츠비 2021. 8. 15.

안녕하세요. 모두의 백과사전 by 캣츠비 입니다.

 

이 포스트를 작성하는 오늘은 제 76주년 광복절 입니다.

광복절은 1910년 일본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인데요, 

일본 입장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특히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날로 "종전 기념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법률에 명시된 정식 명칭을 살펴보면 전몰자를 추도하여 평화를 기원하는 날

(戦没者を追悼し平和を祈念する日)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국가의 입장이 반영된 어찌보면 반성이 전혀 없는 일본 특유의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의례 일본의 고위 관료나 정치가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전쟁 피해국가인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 여러 동아시아 나라들의 비난을 받는데요, 도대체 야스쿠니 신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되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신사란 무엇인가?

일본의 평범한 소규모 신사

신사(神社, 영어로는 Shrine, 일본어로는 じんじゃ)는 일본의 토속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토의 신을 모시는 종교 시설입니다. 신사는 교회, 모스크, 절 등과 같이 다른 종교 시설과는 조금 다른 점을 보이는데요, 신을 모시다는 점은 같지만, 모시는 신 또는 종교의 수장이 추구하는 이상을 대중에게 알리고 설득하여 종교인으로 만드는 등 포교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단순한 제사 시설로 모시는 신의 특징이나 장소에 따라 신전을 바다 위에 만들기도하고 산 정상, 또는 농경지 한가운데에 만들기도 합니다. 다만 신사의 종류에 따라 제단 외에 결혼식이나 마을의 모임을 가질 수 있는 회당 등이 존재하는 곳도 있습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첫 신사는 서기 927년 경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본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는데,

1972년 일본 문화부에서 전수조사를 실시한 결과 일본 전역에 약 79,000여 개의 신사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치요다구의 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로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영령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야스쿠니 신사가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를 모시는 곳은 맞지만 

처음부터 태평양 전쟁의 전범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야스쿠니 신사도 다른 대형 신사처럼 완전한 독립 법인으로 1869년 도쿄 쇼콘자(東京招魂社)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1년 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막 근대화를 진행하려고 하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황에게 국정운영을 양보했음에도 권력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 막부 세력과 막부 세력을 없애고 새로운 권력을 잡기를 원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속한 조슈 번을 위시한 반막부 세력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천황이 지지하는 반막부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반막부세력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 였습니다.

 


일본의 확장의지와 전쟁

처음에는 메이지 유신과 앞서 설명한 보신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모시는 신사로 시작한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이 지지하는 세력의 희생자를 모신다는 이유로 천황의 칙사가 예물을 바치는 신사로 격상되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과 근대화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일본인의 위패 또한 신사 내에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대한제국 포함)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윤요호사건,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물론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과의 전투 중 대표적인 청산리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11명의 위패도 들어가 있습니다.

 

청나라 침략과정에는 청일전쟁, 제남사변, 만주사변, 중일 전쟁 등에서 희생된 이들의 위패가 있으며,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희생된 일본군 약 8만명의 위패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하나인 태평양 전쟁으로 약 213만여 명의 희생자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어쩔수 없이 전쟁에 징집된 일반 군인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을 직접 지시하고 주도한 상시의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까지 안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전후 극동국제군사제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은 14명을 모시고 있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A급 전범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의미

연합군은 전후 황제가 직접 관할하던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민간 법인으로 바꾸고 전범들의 위패를 퇴출함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의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실 연합군은 야스쿠니 신사를 불태워 없애는 것까지 고려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신부의 만류로 존속시키게 됩니다.  일본을 지배하던 미국 극동사령부가 물러나자 일본 정부는 점차 전범들을 다시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958년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전범들이 모두 풀려나자 일본은 후생노동성의 주도로 우선 B급과 C급 전범들을 조금씩 신사 내에 들여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일본의 수상이자 육군대장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 英機)를 비롯한 14명의 A급 전범은 아직 모시지 못했는데, 1966년 일본 정부는 신사에 이들의 명단을 신사에 제출하면서 위패를 모실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책임 제관이었던 후지마로 쓰쿠바는 결정을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습니다.

이후 후지마로 쓰쿠바가 사망하자 일본 정부는 후임 제관에게 다시 요구하여 마침내 1978년 야스쿠니 신사는 비밀리에 14명의 A급 전범의 위패를 합사하게 됩니다.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려고 했으나, 결국 1년 만에 일본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중에게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합사 유지 여부에 대한 제대로된 논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도조 히데키

전후 일본은 계속해서 성장해나갔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우익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은 다시금 강력한 일본을 만들기를 희망했으며,

이 과정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데, 신사 참배, 특히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결과적으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계속해서 갈등이 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식민화를 주도한 이들뿐만 아니라 국권 침탈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일본 군인들을 기리는 위패도 야스쿠니 신사에 존재하는 만큼 일본 고위 관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결코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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