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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것들

by 캣-츠비 2021. 8. 3.

안녕하세요. 모두의 백과사전 by 캣츠비 입니다.

천문학, 물리학, 수학, 철학 분야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공헌은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칭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양계와 태양계 내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 그의 업적은

오랜 시간동안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면서 업적의 가치를 훼손해왔습니다.

 

오늘 포스트에서는 갈릴레오가 현대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최초의 망원경 중 하나를 개발하다

역사에서 최초의 망원경은 1608년 네덜란드의 안경제조사였던 한스 리퍼세이(Hans Lippershey)가 발명했습니다.

비록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망원경의 품질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새로운 발명품에 대해 배운 후 그는 렌즈 접지 방법을 스스로 익히면서 자신만의 발명품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레오가 만든 첫 번째 망원경은 멀리 있는 물체를 3배 확대할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연구하여 그해 가을에는

최대 20배 배율의 렌즈를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혁신은 그에게 직업적 성공과 함께 재정적인 안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이전부터 가르쳤던 파도바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연봉 또한 이전보다 2배나 상승하게 괴었습니다.이 뿐만 아니라 그는 망원경을 항해도구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베네치아 상인 연합과 계약을 맺고 망원경을 생산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천문학의 창시자들을 도와주다

직업과 재정적 안정을 찾은 갈릴레오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새자신이 만든 고성능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1610년 초에 그는 놀라운 일련의 발견 중

첫 번째 발견을 했습니다. 그는 목성 주위를 돌고 있는 목성 근처의 별 여러 개를 몇 주 동안 관찰했습니다.

이를 통해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했으며, 자신을 후원하는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따 위성의 이름을

 메디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현대사회에 들어 그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이 별은 갈릴레이 위성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과 그 일식의 궤도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지도 제작자가

지도 제작을 위해 구축한 보다 정확한 시간표와 측정값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갈릴레오가 활동하던 당시의 과학은 종교를 뒷받침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학에서는 우주가 신이 창조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환경이라고 주장했지만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그와 같은 주장을 흔드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계속된 관찰과 기록을 통해 달이 거칠고 고르지 않은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실제로 달 표면에는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고 불완전한 구체였습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금성의 위상과 우리은하에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훨씬 더 많은 별의 존재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또한 눈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태양을 볼 수 있는 망원경 덕분에 흑점으로 알려진 현상을 관찰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또한 그의 증거를 사용하여 흑점이 실제로는 태양의 위성이지 불규칙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료 과학자들의 논쟁을 물리치고 자신의 발견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동설을 증명하는데 도움을 주다 

1610년 갈릴레오는 그의 새로운 발견을 Sidereus Nuncius(영어명: Starry Messenger)라는 책으로 출간했으며,

이 책은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투스카니에서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임명되었으며, 요하네스 케플러를 비롯한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과 친해졌습니다.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케플러의 연구는 나중에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케플러의 실험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자전이론을 뒷받침해주었는데,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케플러의 행성 운동 아이디어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으며,

그들의 상세한 연구와 관찰은 과학 혁명에 박차를 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력 중심이라는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고정되고 불변하는 우주에 대한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의 2,000년 간의 과학적 사실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세기 후반에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두 개의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포함하여 수년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시험해 왔으며, 물체는 무게에 따라 다른 속도로 떨어질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주장을 입증해내기도 했습니다.(후대에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이 이론의 토대가 보강됨)

 


그의 공헌에 대해 높은 대가를 치르다

 

그러나 당시에 우주에서 지구의 역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지구 중심주의는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론적 토대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의 연구는 교회 당국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1615년에 그는 가톨릭 성경과 모순되는 믿음으로 이단으로 기소되어 로마 종교 재판에 소환되었습니다. 이듬해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모든 작품을 금지하고 갈릴레오가 그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15년 이상 조용히 연구를 계속해나갔습니다.

1632년에 그가 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새 교황이 선출된 후, 그는 또 다른 책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과학적(그리고 종교적) 논쟁의 양쪽을 주장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론의 측면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결국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1633년 재판을 받은 후 그는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철회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마저도 가택연금으로 1642년 사망시까지 더이상

외부활동은 물론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도 출간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레오가 죽은 후 가톨릭 교회가 태양 중심설에 대한 반대를 철회하는 데에는 20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1992년, 10년에 걸친 심사과정을 거쳐 그가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359년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식적으로 갈릴레오의 처우에 대해 교회의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1995년에 갈릴레오라는 이름이 붙여진 무인 우주선이 목성에 착륙하여 갈릴레오가

1610년에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준 이 행성과 그 위성에 대한 다년간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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