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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전

실리콘 밸리의 역사

by 캣-츠비 2021. 8. 7.

안녕하세요. 모두의 백과사전 by 캣츠비 입니다.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 남부지역에 위치한 거대한 산업지역으로

스탠포드 대학이 위치한 팔로 알토(Palo Alto)를 중심으로 거대한 IT 산업 센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팔로 알토를 중심으로 북서부 산타클라라(Santa Clara), 남쪽으로는 산 호세(San Jose)까지 뻗어있습니다.

익히 알려진대로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의 이름은 반도체의 필수 재료인 실리콘에서 유래하였는데,

20세기 중반부터 이곳에 전자회사와 IT회사가 집중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불려졌습니다.

초창기 실리콘 벨리는 컴퓨터와 반도체, 주변 부품의 제조와 소프트웨어 연구개발이 중심이었지만

현재는 소프트웨어와 함께 인터넷 서비스 산업으로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Valley of Heart’s Delight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지만 20세기 초만하더라도 실리콘 밸리 지역은

농업과 과수원 산업이 중심이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특히 농가에 높은 소득을 올려줄 수 있는 과일이 많이 재배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음의 기쁨의 계곡(Valley of Heart's Delight)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과일이 넘처나던 작은 마을이 이제는 최첨단 디지털 산업을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이제 실리콘 밸리는 첨단 산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실리콘 밸리는 지역 경제 발전 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에 새로운 부의 원천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국의 다른 주들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까지도  "실리콘 밸리"를 모방하여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일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리콘 밸리가 성공한 원인을 정확히

재현해내지 못해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터먼 스탠포드 산업 단지: Terman and Stanford Industrial Park

 

오늘날의 실로콘 밸리를 형성하게 된 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누구라도 프레데릭 E. 터먼(Frederick E. Terman, 1900-1982)를 언급할 것입니다.

 

터먼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대학원생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진들이 우수한 학생들을 기업에

연결해주고 컨설팅을 통해 산업 전반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졸업 후 스탠포드대학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1925년 고향인 팔로 알토로 돌아왔는데,

스탠포드대학에 전기공학 관련 학과가 부족한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MIT에는 전자, 전력공학은 물론 통신과 같은 광범위한 학문을 다루었고

교수진도 훌륭했지만 스탠포드대학에는 오직 전력공학 관련 학과만 있었습니다.

터먼은 스탠포드 대학에 요구하여 대학 내에 라디오 및 통신 연구센터를 건립하였고

자신의 제자였던 윌리엄 휴렛(Wiliam Hewlett)과 데이빗 패커드(David Packard) - 뒤에 Hewlett-Packard를 설립 -,

유진 리톤(Eugene Litton) - 뒤에 Litton Industries를 설립 - 과 같은 학생들에게 지역사회 내에서 

회사를 설립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터먼 스스로도 이러한 신생 기업에 투자하면서 스탠포드 대학을 지역의 산업과 연계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이어갔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중에 레이더 방해 전파 기술 연구를 위해 잠시 하버드 대학으로 떠났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스탠포드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돌아왔을 때에는 전자공학부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과 학부에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안정적인 연구자금 확보를 위해 정부에

군사용 연구개발의 배정을 계속해서 요구했습니다.

그 덕분에 1950년대에 들어 스탠포드 대학은 미시시피강 서쪽의 대학 들 중에서는 정부 연구계약을

가장 많이 따낸 대학이 되기도 했습니다.

 

1951년, 터먼은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Stanford Industrial)이라는 연구단지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 단지는

첨단 기술 기업에게만 대학 소유의 부지에 기업을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장기 임대를 허용했습니다.

이 노력은 바로 효과를 보여 곧바로 Varian Associates, Eastman Kodak Company, General Electric Company, Admiral Corporation등의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했으며, Lockheed Martin Corporation, Hewlett-Packard 등은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은 철저하게 대학과 기업의 연계를 추구했습니다.

스탠포드의 교수진은 입주 기업에 컨설팅을 제공하였으며, 회사는 반대급부로 스탠포드를 졸업하는 최고의 학생을

채용했습니다.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은 실리콘 밸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회사가 이 지역으로 이전을 해왔고 기본적인 전자 부품, 기술 및 비즈니스 용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전의 많은 이들이 자신의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스타트업은 실리콘 밸리를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반도체에서부터 퍼스널 컴퓨터 까지

1956년 노벨상을 수상자이자 트랜지스터의 공동 발명가인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는 이 곳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설립 1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에 불만을 가진

연구원들이 퇴사하여 산타 클라라 인근에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 사(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은 미국 반도체 환경을 형성한 많은 기업 분열 중 첫 번째 사례였으며, 페어차일드의 연구원들은 마침내

1958년에 직접회로를 발명해냈습니다. 1960년대에 미국에 설립된 31개의 반도체 기업 중 실리콘 밸리에 위치하지

않은 기업은 5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5개를 제외한 나머지 25개 기업은 모두 페어차일드의 엔지니어가

회사를 떠나 새로 설립한 기업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반도체 시장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미군이 반도체 수요의 50%이상을 차지했지만 1972년에는 이 비중이 12%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조금씩 작아지고 민간이 사용가능한 프로그램이 조금씩 개발되면서 민간용 컴퓨터에 필요한

반도체가 미군의 수요를 대체했으며, 그 수요는 군용 수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시장의 성장에 맞춰 반도체 제조장비는 물론 계측기와 측정장비의 수요도 계속 증가하였으며,

이를 공급하는 기업들도 실리콘 밸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실리콘 밸리에서는 기업을 설립하고, 벤처 캐피털을 찾고, 공간을 임대하고, 직원을 고용하고, 몇 주 만에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실리콘 밸리 경제의 중심이 반도체에서 퍼스널 컴퓨터 제조로, 그 다음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기반 비즈니스로 이동하면서 실리콘 밸리의 풍경은 또다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과도기인 1986~92년 동안 실리콘 밸리의 경제 성장은 연간 0.7%의 저조한 수준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많은 제조업체가 외국 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 산업 보호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포드의

학생들은 1982년 Sun Microsystems, Yahoo를 포함하여 매년 약 100여 개의 새로운 회사를 계속 설립했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지적 밀집도는 높아졌고 직원과 기술의 끊임없는 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성장 속에서도 인간 관계는 여전히 실리콘 밸리의 사업 수행 방식의 핵심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터넷 시대에는 미국 정부가 밸리 개발 초기에 군사 연구 자금을 제공했을 때만큼이나 인간 관계가 중요합니다.

벤처 캐피털리스트는 매년 수천개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접하지만 일반적으로 자금 조달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 프레젠테이션과 설립자의 성격이었습니다. 때로는 훌륭한 아이디어라도 형편없는 프레젠테이션으로 인해 비즈니스 기회를 잃기도 했는데 이는 혁신을 가장 중요시하는 실리콘 밸리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폭발적인 성장

 

반도체의 발명 이후로 실리콘 밸리와 성장은 미국에서 동의어로 취급되었습니다.

1959년 실리콘 밸리에는 대략 18,000개의 첨단산업과 관련된 일자리가 있었지만 1971년에는 약 117,000개가 되었으며, 1990년에는 IT관련 일자리가 28만개를 넘어섰습니다.

특히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실리콘 밸리는 매년 4만개에 가까운 일자리가 생겨났으며, 캘리포니아주 수출 무역의

약 40%를 차지했습니다. 첨단 기술 근로자, 특히 엔지니어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는 더시아 미국내의 대학 졸업생으로는 채울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미국은 전문 엔지니어에 대한 이민 할당량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외국에서 많은 IT 전문인력이 실리콘 밸리로 몰려들었으며, 특히 인도와 중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더 나은 일자리와 새로운 기회를 위해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산업의 성장에 맞춰 인구 또한 증가하였는데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산타클라라 카운티의 인구는 2배 이상 증가했으며 2000년대 들이 실리콘 밸리 주변 도시의 인구는 2백만명 이상이 증가했습니다.

산 호세 지역만해도 1960년에 불과 20만명에 불과했지만 19998년에는 90만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구의 증가는 다른 문제도 야기시켰는데, 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산타 클라라 지역의  주택 평균 가격은 주요 대도시 지역의  평균 가격의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터지는 거품

 

2000년은 인터넷 기반 회사의 상장 주식의 액면가가 업계의 실제 수익 잠재력을 훨씬 초과하여 상승했던 5년 기간인 "인터넷 거품"의 끝이었습니다. 2005년, 주식시장에 상장된 실리콘 밸리 기업의 가치는 최정점기의 1/3로 줄어들었으며, 장부가치로 약 2조 달러의 금액이 증발했습니다. 이는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2005년 산타 클라라 지역의 일자리는 10년 전인 1995년보다 줄어들었으며, 스타트업 기업의 생명줄인 벤처 캐피털 펀딩 규모는

2000년 1,055억 달러에서 2004년 209억 달러로 1/5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실리콘 밸리를 영원히 비출것 같은 실리콘 밸리의 태양도 서서히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유명한 낙관론은 버블과 함께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2008~200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실리콘 밸리의 실업률이 10% 이상음에도 LinkedIn 및 Facebook과 같이 새로 유입된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실리콘 밸리 떠받칠 수 있는

새로운 물결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투자 감소는 이어졌지만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미국 전체 벤처 캐피털 자금의 40%를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중요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본질이나

그러한 놀라운 장소를 가능하게 한 역사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도시들에 거주하는 주민의 대부분은 실리콘 밸리를 원시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칸막이 노동자들은 패스트푸드를 먹고 살고, 자본가들은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며, 똑똑하고 야망있는 젊은이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벤처 캐피탈의 지원을 받고, 열심히 일한다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곳을 채우고 있습니다.

물론 인터넷 거품이 터진 후 이들은 지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단순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사적 기억 상실은 밸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이러한 강조조차도 이 지역의 경제력이 과거와 현재, 군사 계약과 벤처 자본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이제 성장기를 미국 경제가 값비싼 교훈으로 채운 미국 경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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